©Eunjeong Kim
우리가 만든 날씨
[김은정 : 매일매일 ( )]
학고재 아트스페이스 2022.11.10-12.10
- 홍예지 미술비평
“내 주변은 살며시 솟아올랐고, 속박에서 벗어난, 새로 태어난 나의 정신이 그 위로 떠올랐다. 언덕은 먼지구름으로 변했으며 – 나는 구름을 뚫고 연인의 변용된 면모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서 영원이 쉬고 있었다.”1
연보라 나비 한 마리 하늘 위로 떠오른다. ‘어린 날개는 물결에 절어’2 푸르스름한 빛을 띤다. 그를 놀라게 한 바다의 깊이는 다음 순간 파도의 높이로 바뀐다. 하늘을 향해 산처럼 솟는 바다와 보이지 않는 바람을 타고 오르는 나비. 김은정의 그림을 보며 ‘프시케(psyche)’의 의미를 떠올린다. 오랫동안 프시케는 나비와 영혼, 정신을 함께 뜻하는 말로 쓰였다. 그렇다면 그림에서 나비는 ‘새로 태어난’ 정신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련을 통과한 정신은 날개 아래의 소란을 인식하면서도 휘둘리지 않는다. 오히려 한층 고양된 상태로, 구름을 뚫고 저 높이 올라간다.
올라가면 무엇이 펼쳐질까? <구름의 모서리>(2022)를 보면 하늘인지 바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풍경이 정신을 둘러싼다. 부드러운 크림이 섞인 분홍과 청명한 파랑이 임의의 경계선을 긋는 곳. 그곳엔 빙하인 척 눈속임을 하는 구름이 사방을 뒤덮는다. <읽는 사람>(2022)에서 한 여자는 구름을 방석처럼 깔고 앉아 책을 읽는다. 그가 읽고 있는 책은 ‘시간’이라는 책이다. 너무 고요해서 모든 것이 멈춘 듯한 공간에, 책장을 넘기는 손가락만이 규칙적인 리듬을 자아낸다. 숨 하나에 1초가 흐르고, 두 눈 속에 영원이 담긴다.
‘읽는 사람’이 앉은 자리는 “내면 세계와 외부 세계가 서로 접촉하는 지점”이다. 여기가 바로 “영혼의 자리”다.3 그의 몸을 받쳐주고 있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구름이 아니라 물이다. 구름은 물이 주는 유동적인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물은 여자의 몸을 “어머니처럼 흔들어준다.”4 잔잔히 흔들리는 물결에 태곳적 기억이 흘러들어와 섞인다. 꿈꾸는 자의 영혼은 지리적, 시간적 경계를 넘어 자유로이 떠다닌다. 원래 어느 해질녘, 바닷가였던 곳이 하늘 속 몽상의 무대로 바뀐다. 물과 하늘의 “질료적 연속성”5 에 의해, 그리고 화가의 촉촉한 상상력에 의해 이런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 몽환적인 풍경에서는 내면에 몰두하는 한 여자와 그를 바라보는 또 다른 여자, 즉 화가 자신의 감정이 한데 뒤섞여 어디에도 없는 날씨가 만들어진다.
김은정의 그림 속 인물들은 날씨의 영향을 받지만 스스로 날씨를 만들기도 한다. 그들은 공중으로 흩어지는 연기 속에서, 휘날리는 눈송이 속에서, 문득 새 정신이 깨어나는 것을 느끼고 변화를 일으킨다. 바깥 날씨가 매일매일 달라지는 것처럼, 내면의 날씨도 매 순간 달라진다. 그 미세한 움직임을 알아채는 순간은 우연한 마주침이나 반복에 균열을 내는 사소한 사건과 관련될 것이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아주 여린 세기로 시작된 변화는 어느새 내면의 풍광을 뒤엎고, 나아가 바깥 환경 전체의 리듬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이 날씨에 참여한다. 동물들도 마찬가지다. 다른 말로 하면, 지구라는 공통된 기반 위에서 객관적으로 공유되는 날씨가 있고, 그에 반응하여 시시각각 일어나는 주관적 날씨들이 있다. 이 두 종류의 날씨가 서로 교차하며 무수한 분위기가 생성된다. 우리는 바로 이런분위기의 순환 속에서 하루하루 숨쉬며 살아간다.
우리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우리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는 날씨는 언어로 명확히 서술되기 어렵다. 그래서 그림이 필요하다. 김은정은 낱말이라는 틀에 날씨를 가두는 대신, 화폭을 펼쳐 네 모서리를 넘어서는 자연의 사이클을 불러낸다. 예를 들어 <봄을 쫓아>(2022)에는 늘 새로운 바람이 드나들고, 바람을 따라 영롱한 깃털을 지닌 새들이 날아든다. 새들의 노래가 맑은 공기를 울리면, <겨울숲과 고양이 셋>(2022)에서처럼 길 가던 고양이의 털이 바짝 곤두선다. 또 <겨울산책>(2022)에서 눈 덮인 길을 걷던 두 사람은 발자국을 들여다보거나 싹이 오른 나뭇가지를 올려다보며 초봄에 가까워진 날씨를 눈치챈다. 각각의 풍경에는 말이 필요 없다. 단지 날개 달린 듯 가벼운 손짓이, 내면과 외면을 섬세하게 잇는 시선이 있을 뿐이다.
변화무쌍함을 변덕스러움으로 여길 때, 변화는 우리 손을 떠나 있는 것이 된다. 우리는 어찌할 수 없는 것에 두려움과 무력감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부정적인 감정으로 채색된 변화는 일상을 위협하는 훼방꾼처럼 여겨진다. 그에 맞서 동일한 리듬을 고수하는 것이 우리의 고집스러운 반응이다. 날씨는 이런 변덕스러움의 카테고리에 가장 잘 어울리는 예처럼 보인다. 그 자체로 경계와 주의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 카테고리 안의 다른 항목들을 아우르는 적절한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 하여 날씨를 본다면 – 그러니까 우리가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매일매일 해석하고 행동함으로써 환경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한다면, 날씨는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는 것이 된다. 삶에 통합된 날씨는 우리가 겪는 다양한 사건과 만남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내밀한 감정과 기분, 느낌을 다른 이와 공유하는 매개체가 되어준다.
김은정의 《매일매일 ( )》은 바로 이런 시각에서 날씨를 바라보며 일상을 가꾸어 나간 기록이다. 화가의 몸을 감싸는 청량한 공기와 높이 떠 있는 구름,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 산책길에 만난 이웃과 고양이들이 사계절을 함께 통과하는 여정을 담았다. 마치 한 권의 시집처럼, 화면과 화면을 연결하는 자유 연상이 미묘한 아름다움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김은정의 그림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조금은 유연해진 마음으로, 다가올 새 계절의 즐거움을 기다린다.
1.노발리스, 『밤의 찬가 / 철학 파편집』, 박술 옮김, 얻다, 2018, p.15.김기림, 「바다와 나비」, 1939.
2.노발리스, 앞의 책, pp.40-41.
3.가스통 바슐라르, 『물과 꿈』, 김병욱 옮김, 이학사, 2020, pp.213-214. 위의 책, p.216.
[KIM Eun Jeong: WEATHERL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