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jeong Kim
얼굴은 ‘볼 수’ 있지만 ‘알아보기’ 힘들다
[김은정: 홈커밍] 2019.08.15-30
콘노유키
우리는 흔히 페인팅을 본다고 하지만 대부분, 특히 추상회화가 아닌 구상회화를 볼 때 페인팅 자체보다는 물감이 무슨 형상을 닮았는지 보게 된다. 어떤 인물이 캔버스에 그려질 때, 우리는 그 대상을 인물로 인식하지 물감의 덩어리나 붓질로 인식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다음으로는 공간에 시선이 간다. 이른바 환영적 공간을 연출하는 페인팅은 평면성보다 공간의 깊이감을 창출한다. (중략) 그것이 페인팅이었다는 사실로 재현과 환영적 공간을 막아서는 작업이 바로 김은정의 페인팅이다. 그의 작업을 볼 때 우리는 몰입을 시도하다가 시선이 가로막혀버린다. 이번 전시<홈커밍>에서 소개된 작업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어떤 장면을 그렸는데 거리감을 조절하여 그려진다. 여기서 말하는 거리감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과 시선을 공유할 수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달라진다. 예를 들어 〈작년에 만난 거품〉(2019)처럼 구체적인 대상에 등장인물의 시선을 찾을 수 있는 작품도 있고, 〈방과후〉
(2018)나 〈산책〉(2018)처럼 등장인물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는 작품도 있다. 후자가 그렇듯이 여럿이 모여 어떤 대상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있는 그림에서 우리는 그 대상을 페인팅에서 발견하지 못한다. 작가가 제목을 통해 폭로하지도 않고 우리는 캔버스에 그 대상을 찾아볼 수도 없다.그렇지만 김은정의 페인팅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대상을 파악하지 못할 때 그것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는데 이는 작가가 주제와 표현방식에서 거리감을 다루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 《홈커밍》에 포함된 작업은 작가가 일본이나 영국을 비롯한 외국에서 목격하고 경험한 장면을 소재로 다룬 것이다. ‘홈커밍’이라는 단어가 귀향이나 동창회를 뜻하는데, 이 단어의 의미는 친숙한 사람보다는 낯섦에 더 맞춰진다. 시간이 흘러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 봐도 파악할 수 없는’ 거리감은, 작가가 해외에서 경험한 여러 장면과 무리에 속하지 못하고 있는 장면에 먼저 등장한다. 멀리서 쳐다보는 작가의 시선은 전시공간에서 그의 페인팅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동기화한다. 말하자면 어떤 무리에 속하지 않고 시선이 향하는 대상이 무엇인지 보여지지 않는 위치에 선 작가의 거리감은 페인팅의 환영적 공간에 끝까지 들어가지 못하는 감상자의 위치와 나란히 서게 된다. 인물들의 시선이나 손가락 방향은 관람자의 시선을 페인팅 속 무대를 향해 유도한다.모두가 함께 바라보는 곳에서 가까이 가서 보려고 하지만 결국 그 무대에서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파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봤자 그것은 그림이기 때문이다.재현된 공간으로 들어가려고 혹은 원근법과 대상에 시선을 맞추려고 집중하지만, 사실 거기에 아무것도 없어서가 아니라 페인팅이기에 그들이 다 같이 보는 방향과 시선은 차단된다. 이처럼 페인팅 표면 자체에 대한 시선은 환영적 무대에 올라간 주인공이 아니라 멀리서 바라보는 작가의 시선과 위치를 동기화한다. 대상이 명확하게 나온 〈작년에 만난 거품〉에서 감상자가 ‘함께’ 보게 되는 것과 달리, 〈시선회피〉나 〈산책〉은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감상자의 시선을 페인팅이 막아 버린다. 이때 감상자는 페인팅 앞에서 작가의 입장에 함께 서게 된다. 궁극적으로 내가 거기에 끼지 못하고거리를 유지하는 것과 같이, 감상자는 페인팅 속 무대로 들어가지 못해 그 표면만 보게 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하면서도 이제 시선은 환영적 공간의 무대에서 페인팅 자체의 표면으로 돌리게 된다.그들의 시선이 아닌 작가의 시선이 동기화된 관람객은 페인팅 표면을 보다가 다른 곳을 향해 시선이 흩어진다. 예를 들어 여학생들을 덮는 흐릿한 아우라 (같은 것)(〈방과후〉), 옆에서 보는 관객들의 (무)표정(〈차이나타운〉, 2019), 그리고 작품 중앙에서 절단되어 중첩된 이미지로 그려지는 남성(〈깃깃사람사람〉, 2019)은 시선을한 곳을 향해 집중시키지 않고 표면의 다른 곳들로 시선을 자꾸 향하게 만든다. 작가의 시선은 그들이 무언가를 보고 있는 장면을 주변부에서 포착하면서 그들이 보는 것과 내가 보는 것 사이의 공간적 거리감, 더 나아가 페인팅의 공간과 감상자 사이의 거리감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거리감은 페인팅 자체에 시선을 돌리게 하여 오히려 그들(페인팅 등장인물)이 직면할 수 없는 낯섦을 발견하게 된다. 〈방과후〉에서 우리는 그들의 표정도 그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도 파악할 수 없지만, 그들이 보는 것과 다른 곳을 또 본다. 사실 일본 진보쵸에 위치한 헌책방 앞에 진열된 책들을 보는 여학생 세 명을 그린 이 작업은 세 명을 감싸는 그림자와 배제된 묘사를 통해 낯설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