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njeong Kim

유월은 적당한 시간, 섬은 적당한 여백.
오웅진(@55ooofff)
[San Serriffe Is.] 2024.6.15. - 7.7

섬은 무한을 수납한다. 이것의 증명을 위해 우선 그 섬의 둘레를 재보기로 한다. 아주 간단하게는 그 섬의 중심에서 해변까지의 거리를 재어 계산할 수 있다. 또는 우리가 그 해변을 직접 걸어볼 수도 있다. 긴 자를 손에 쥔 채 찬찬히 걷기로 한다. 마침 걷던 시기의 물때가 간조에 가까워 바닥의 부스러기들이 형체를 드러냈으니, 조금 더 걸음을 내디뎌 여기까지 재보기로 한다. 아직 제주에선 여전히 ‘여礖’라 부르는 그곳까지. 그렇게 여까지 딛어보니 가까이 더 작지만, 단단히 박힌 돌멩이가 보인다. 단단히 박혔으니 섬의 둘레가 아닐 리 없다. 이것까지만 재고 돌아가기로 한다. 돌멩이 위에 작은 모래가 보인다. 모래까지만 재기로 한다. 그렇게 점점 더 낮고 작은 지점을 잰다. 섬의 코너를 채 돌기도 전에 해가 지고 썰물이 끝나 여는 사라진다. 무한의 한 귀퉁이만을 겨우 재고, 서둘러 돌아온다. 섬은 저녁이면 물이 차는데, 어쩐지 달이 깊게 누운 어느 밤엔가 평소보다 바닷물이 더 깊게 들이찬다. 멈출 줄 모르더니, 결국 뭍까지. 몸까지 온다.

실제로 그렇다. 달 가까운 바다엔 물이 차고, 이에 따라 근처 바다는 물이 빠진다. 낭만이라면 물이 찬 바다의 지구 정 반대편의 바다 역시 물이 차오른다는 점이다. 이 반대편의 바다에 산 세리프 섬이 존재한다. 산 세리프는 쉽게 닿을 수 없는 섬이 아니다. 인도양엔 115개의 군도로 이루어진 섬나라, 세이셸 공화국이 있다. 그리고 세이셸과 스리랑카 사이 산 세리프(San Serriffe)라는 이름으로 그 섬이 있다. 1977년 영국 가디언지의 휴양지 특별호에 소개되면서 비교적 최근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섬은 작지만, 고유의 화폐와, 멋진 서점, 우편 시스템 같은 걸 갖췄으며 다녀간 많은 이들은 이곳에서 인상적인 휴가를 보냈다는 후기를 남겼다. 오브의 이번 전시는 성큼 다가온 무더위를 맞아 이 멋진 휴양지로부터 모범을 찾는다. 또한 이 글은 이번 전시 기간 오브에 들어선 총 네 군도의 범례를 자처한다. 이번 산 세리프 섬에 여러분보다 앞서 도착한 네 작가의 공통점이라면 가상(假像)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들이 각각 어떤 가상을 이번 전시 기간 오브에 가져왔는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이들과의 첫 만남을 이야기하는 게 도움이 될 것 같다. 우연히도 나는 이 네 작가를 봄(한수진), 여름(전희경), 가을(김아름), 겨울(김은정) 이렇게 사계절에 걸쳐 만났다.

(중략)

마지막으로 이 글을 쓰면서 김은정 작업에 관하여 이야기할 때 김아름으로부터 여백을 바통처럼 받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전시에 관해 작가와 처음 얘기 나눈 것은 지난해 겨울 봄로야 작가와 사흘간 짧게 진행한 프로젝트의 마지막 날이었다. 그날은 눈이 무척 많이 왔고, 덕분에 우린 눈사람도 만들고, 차고 따뜻한 걸 적당히 들이키며 덩굴이를 떠나보내고 있었다. 눈을 헤집고 작가가 왔고, 집에서 무척 오랜만에 나왔다고 말했다. 이날 눈이 많이 쌓여 그랬던 건지 우리는 그날 지붕의 처마 끝에 길게 내려선 홈통(gutter)에 관해 이야기했다. 만화에선 이것을 칸과 칸 사이의 하얀 여백, 즉 칸새의 영단어로 쓰기도 한다. 작가는 다양한 측면에서 여백이나 틈을 고민하고 있었다. 이 전시에서 김은정에겐 그 틈에 관한 작업이 주요 실험이다. 더 중요한 건 이 틈 사이를 오가는 고양이 한 마리다. 혹은 여러 마리. 작가의 작업과 작업, 그 틈 사이를 집 삼아 체류하는 고양이가 있다. 고양이는 조금 하얗고, 간혹 파란 모자를 쓰고 있다. 실제로 페인터이면서 책 편집 디자이너인 작가에게 2D와 3D ‘사이’의 틈을 탐구하는 과정은 2D, 3D 각각에 대한 탐구만큼이나 중요하다. 작가의 표현에 따라 3차원의 오브제는 2차원의 세계로부터 튀어 오른 존재일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2차원의 이미지를 3차원에서 일부가 부서져 내린 결과로 인식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사람을 그리고, 누군가는 풍경을 그리듯 ‘그림’을 그리는 작가를 찾아다닌 적이 있다. 그러면서 당시 막연히 상상했던 것은 그 작가가 뭔가 ‘규격’ 같은 걸 다루는 이였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 근거는 규격, 또는 규칙이 무엇의 고향인지를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어린 시절 좁은 운동장에 많은 아이들을 줄 세우는 과정은 그들 사이 여백을 설정하는 과정으로 귀결된다. 즉 규격은 여백의 총체이다. 언젠가 흑돌과 백돌의 구성으로 진행되는 바둑의 변형으로 흰돌만으로 진행되는 일색 바둑에 관한 얘기를 들은 적 있다. 그리고 급기야 아예 돌 없이 두는 무석 바둑에 관한 얘기도 들은 적 있다. 이 지경에 이르면 바둑은 최소한의 모든 물질을 벗고, ‘여백’만으로 동작하는 셈이다. 대개 그림에 맺힌 상은 무언가의 대리자(agency)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들이 대리나, 대리물(surrogate)이 아닌, 그것으로 인한 배치(agencement)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페인터의 모범으로서 이러한 규격 같은 걸 능숙하게 다루는 이를 찾고 있었고, 김은정은 그런 막연한 낭만에 가장 적극적인 모범으로 볼 수 있다. 김은정은 이 전시에서 자신의 작업을 배치하는 과정에서 공간 자체를 여백화한다. 그림과 그림 사이로 공간을 미끄러지게 만들고, 접히고 꺾이게 만든다. 간혹 어떤 집은 건축적으로 매우 기이하다. 그런 집 가운데선 방보다 큰 문을 지니기도 하고, 그런 집엔 보통 책장보다 두꺼운 책이 있으며, 이런 책들 속엔 대개 글보다 긴 글자가 산다. 무슨 용기로 이 작은 공간에 네 개씩이나 되는 섬을 불러들일 무모한 결심을 했는지 묻는다면 그때 김은정의 방법론으로 대충 둘러댈 수 있을 것 같다.

#San Serriffe
섬은 정말 문학적이다. 엄밀하게는 섬의 동작이 문학의 원리를 따른다고 보는 게 더 적절하겠다. 섬은 크게 두 가지의 동세에 의존해 스스로를 증명한다. 하나는 파도와 파도 사이 또는 바다와 바다 사이에 놓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모두와 궁극적으로 거리를 두는 것이다. 섬이 문학을 모사한다니. 이 말은 뭔가 거짓처럼 들린다. 섬은 글, 아니 인간이 있기 전부터 지구에 앞서 있었는데, 인공물에 해당하는 문학을 따를 수가 있나.

섬의 어원을 살펴보는 게 우선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것 같다. 고대 이집트어 가운데 ‘셤shemm’이라고 있었다. 여기서 셤은 당시 “운하 수로에 사방이 둘러싸인, 인공섬”을 뜻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인공적으로 어떤 거리두기를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고립(isolated)되는 땅이 생겼고, 하여 섬(island)은 인공적으로 생산된 외로움으로써 궁극적으로 문학을 모사한다. 전시 하나 차려 놓고 너무 많은 얘기를 끄집어낼 순 없다. 그러나 그래도 괜찮을 정도로 6월 적당한 시간이고, 섬은 적당한 공간이다.

하여 올해의 허리 전시로 《산 세리프 섬 San Serriffe Is.》을 제안한다.

- Areum Kim(@areum_behind)
- Eunjeong Kim(@chandammmm)
- Heekyoung Jeon(@jeikei_jeonheekyoung)
- Sujin Han(@sujan_h)

출처: https://55ooofff.com/San-Serriffe-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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